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량 해전 (문단 편집) === 순천 포위망을 통과한 일본 연락선 === 1598년 12월 초(음력 11월 초), [[고니시 유키나가]]는 [[진린]]과 [[이순신]]에게 퇴각까진 아니어도 연락선만이라도 다닐 수 있게 해달라며[* 조명연합군에 의해 10월에 포위되기 이전까진 순천(고니시)-사천(시마즈) 사이 이전부터 연락선이 오갔다. 한 번은 순천에서 사천으로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시마즈의 가신 시키네 요리모토(敷根頼元), 가마타 마사토미(鎌田政冨)가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.] 뇌물을 보냈다. 이순신은 몹시 어이없어 하며 뇌물을 가져온 사신을 죽이려다 참고 돌려보냈다. 하지만 진린은 이를 수락해 연락선 1척의 통과를 허용했다. 1598년 12월 11일(음력 11월 14일) 무렵, 일본군 4명이 탄 고니시의 연락선이 [[진린]] 측 포위망을 통과했다. [[이순신]]이 격노해 추격을 명했고, 추격군은 [[한산도]]까지 추격했으나 결국 연락선을 놓쳤다.[* 이것이 난중일기의 마지막 내용이다.] 연락을 받은 사천의 [[시마즈 요시히로]]는 고성의 [[타치바나 무네시게]], 남해의 [[소 요시토시]](고니시의 사위), 부산의 [[테라자와 히로타카]] 등에게 남해 창선도로 소집령을 내린다. 이로서 순천의 일본군, 창선도의 일본군 사이에 조명연합군이 도리어 포위된 처지에 놓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